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산도 대첩 (문단 편집) == 한산도 대첩의 결과 ==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참패를 겪은 일본군은 이틀 뒤인 16일 [[안골포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한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총 100척 이상에 달하는 대함대가 고작 3일만에 수장당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이에 더 이상 해상 전투에서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하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완전히 되찾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순신 함대의 4차 출동에는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일본의 본진 [[부산포 해전|부산까지 습격당한다.]] 이렇게 일본군이 해상 요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명나라]]의 남하와 더불어 일본의 임진왜란의 큰 패인이 된다. 또한 한산도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의병]]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해안가에서 거주하던 백성들은 해상의병이 되어 이순신과 함께 싸우거나 지형과 바닷물의 흐름을 알려주어 전략을 짤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해상 의병들은 나중에 명량해전 때도 이순신과 함께 하였는데, 이순신이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하는 데도 따르지 않고 판옥선 뒤에 배를 대어 배가 많아보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당도했을 때 우리 진영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쉽게 말해 '지원군이 도착하면 [[의주]]까지 점령할 텐데, 이제 선조 니가 갈 데가 어디 있겠냐.'고 비아냥댄 것이다.] >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제]] 싸움[* 한산도 대첩을 말한다.]에서 패하면서 한 팔이 꺾였기 때문에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을 점령하였을지라도 군세가 외로워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군량을 조달하고 명령을 전달하여 중흥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동과 천진 등지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와서 구원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이 싸움의 공이다. 한편 전후 논공 행상을 위해 비변사가 선조에게 포상을 논의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 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1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 선조의 ~~노답~~ 원균 총애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참고로 원균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일본군들 하나하나 잡아다가 참수하여 머리를 모으는 중이였는데, 이순신이 항복한 일본 장수와 시체의 머리를 베는 것을 거부하자 이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 수급이 부족하자 원균은 조선 평민을 보이는 대로 죽여서 조정에 왜인의 머리로 속여서 보고하였다. 얼핏 사소한 에피소드이지만, 와키자카는 분노와 회한으로 부들거리던 중 조선의 정찰선을 하나 발견하고 승조원을 깡그리 학살한 뒤 선장을 포로로 끌고 왔지만 그 선장이 탈주해 적진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자를 [[거제도]]에서 판옥선 대함대를 이끈 적장으로 전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